한글을 왜 배워야 해요?
한글을 왜 배워야 해요?
나랏 말미 귁에 달아 문와로 서르 디 아니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 제 뜻을 펼칠 수 없었던 어린 백성들을 위하여 누구라도 쉽게 익혀 쓸 수 있는 한글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언어를 말살당할 위기도 여러 차례 겪었지만, 조상들의 희생과 지혜로 지켜온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 한글. 초·중·종성의 조합으로 무궁무진한 소리를 표기해낼 수 있기에 정보화 시대에 걸맞은 미래 언어라고도 평가받는 자랑스러운 한글이거늘 미국학교에 다니며 영어만 편애하는 내 아들에게 가르치는 일은 어찌 이리도 어려운지….
나는 어머니에게 한글을 배웠다. 늦가을 혹은 겨울이었던 것 같다. 아마도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글자라도 가르쳐서 보내야겠다고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낮에는 농사일, 집에 돌아오면 집안일과 식구들 식사 챙기는 일까지 모든 것을 해내느라 고단하셨을 어머니가 칸이 넓은 공책 한 권을 앞에 놓고 나에게 기역니은을 가르치셨다. 한글 자모를 다 외운 다음 써보고 싶은 말을 하나씩 글자로 적어보던 때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어머니’ ‘아버지’에 이어 ‘가방’ ‘나비’ 등의 말을 스스로 먼저 써보고 어머니랑 같이 써보고 하는 식인데 발음을 처음 글자로 직조해 낼 때 실제로 뇌 속에서 제각각으로 존재하던 자음과 모음이 어떤 논리를 가진 회로를 통해 조합, 재배열되는 감각을 경험했다. 짜릿했다. 어설프게나마 처음으로 느낀 배움의 희열이었던 것 같고, 속된 말로 ‘머리가 돌아가는 느낌’이 신선했다. 흥분에 겨워진 내가 어머니에게 “엄마, 엄마, ‘둑실이’ 써보자.” 했다. ‘둑실이’는 우리 집 개 이름이었다. 글을 깨쳐가는 자식을 보며 자신의 교수법에 뿌듯해하고 계셨을 어머니의 표정이 금세 난감해졌다. 그러고는 대신 ‘바둑이’를 써보자, 하셨다. 나는 ‘둑실이’를 쓰고 싶다고 졸랐지만 어머니는 끝내 내게 ‘바둑이’를 쓰게 하셨고 조금 전까지 들떠있던 나는 지루한 공부 시간에 붙잡힌 아이로 변해 시무룩이 ‘바둑이’를 따라 적었다.
왜 그때 어머니는 ‘둑실이’를 적어주지 않으셨을까 종종 생각했다. 초등학교만 졸업하셨던 어머니가 ‘교육’이라는 엄중하고도 고정된 틀에 갇힌 나머지 부르는 말, 즉 입말에 속하는 ‘둑실이’를 병기할 지적 능력(혹은 용기)이 부족했을 것이라고, 머리가 조금 굵어진 뒤 나는 멋대로 해석했다.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던지! 우리 집에서 개를 가장 사랑하고 보살피는 사람은 어머니였다. 하루에도 수십 번 ‘둑실아’ 부르며 쓰다듬고 입 맞추고 밥그릇에 밥을 부어 주셨다. 모든 식구가 그랬지만 ‘둑실’이라고 부를 때의 발음은 ‘둑’이 ‘툭’과 ‘듁’의 중간 소리에 가까운 울림을 내고 ‘실’은 영어의 /sh/에 가까운 연한 바람소리를 내며 아, 혹은 이, 가 따라 나오는 식이었다. 즉 ‘튝-sheer이’ 정도로 쓰면 그 느낌이 전해질까. 철썩대는 개의 혓바닥이 잦은 파도처럼 드나드는 소리가 ‘튝’과 ‘sheer’의 사이에 있어 둑실아, 부를 때 마다 넘실거리며 달려오던 개의 얼굴과 몸, 그 온몸의 느낌을 혀의 정서로 완벽하게 구사해 내시는 어머니에게 ‘둑’과 ‘실’이라는 단순한 글자로 자신이 아는 그 개의 이름을 쓴다는 것은 도저히 어불성설이었던 것이리라.
그때 ‘둑실이’를 쓰지는 못했지만, 언어에 대한 흥미가 싹둑 잘린 것은 아니어서 우여곡절 나는 여태까지 영어, 일본어, 중국어, 벵골어까지 배우며 살았다. 외국어를 배울 때마다 가장 힘들면서도 재미있는 부분은 언어마다 독특한 고유의 발음을 익히는 것이다. 쉬운 예로 /r/을 /알/이라고 발음하면 안 되고 혀를 말아 올리며 /r/이라고 해야만 진짜 ‘r’이 된다는 것. 발음이 가깝다고 여겨지는 일본어에도 ‘일본어식으로’ 발음해야만 일본어로 인식되는 말이 있다. 벵골어는 방글라데시 사람들을 흉내 낸 발음과 억양으로, 불어는 프랑스식으로, 타갈로그어는 필리핀 사람처럼 말해야만 그 나라 말이 된다. 또한 우리가 한글에 대해 가지는 자긍심은 당연하고 타당한 것이지만, 타 언어권에서도 자기 나라 언어와 문자가 전 세계가 인정하는 가장 우수한 문자라고 인식하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경우가 많다는 점도 알게 되었다. 훌륭한 한글은 자랑스러워하되 우물 안에 갇혀 내 것만 최고라고 외치는 우愚는 최소한 피할 수 있게 되었다.
번역이든 통역이든 AI가 대신해 줄 수 있는 세상이다. 같은 값의 언어를 무수한 다른 언어로 출력해 내는 기술은 다방면으로 유익하다. 다만 미래 세대들이 이런 기술을 이유로 외국어 습득을 등한시하게 될까 봐 걱정되고 아쉽다. 언어는 하나의 새로운 세상이다. 언어 공부가 시 쓰기 방법인 ‘되어보기’와 많이 닮아있다고 하면 도움이 될까. 대상 속에 나를 넣어 봄으로써 대상에 대한 이해의 깊이를 더하고 새로운 면을 발견하는 것. 타인의 언어 속에 자신을 포개어 보는 경험이야말로 평화적으로 인류를 발전시켜온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타인을 이해하는 것은 한 우주를 이해하는 것과 같을 진데 하물며 말이 전혀 다른 우주를 이해한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이냐고, 이런 연습이 있어야만 미래에 외계인을 만났을 때 능히 소통할 수 있다고, 이렇게 아들을 다시 구슬려 봐야겠다.
포엠포엠 2023년 가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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